💭 나의 사색
나는 세상에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세상에 무엇을 요구하면 될까?
추성훈이 가지고 있는 근육질 몸매와 즐겁게 사는 게 부럽다.
내가 35세, 40세, 45세, 50세…에 어떤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삶의 작은 일들에서 즐거움을 채집할 수 있을까.
추성훈이 스무디랑 아이스크림 먹는 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추성훈이 50살이어도 몸매가 훌륭한 게 보기 좋았다.
지금 미래에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결정해 놓아도 나중에 그 결정을 번복하거나 바꿀 수 있을 게 자명하다.
왜냐하면, 지금은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릴 것이고, 나중은 내가 나중에 알고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려보자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추성훈
근육질 몸
단단한 종아리
두꺼운 허벅지
두꺼운 팔뚝
탄탄한 가슴
활짝 펴진 등과 어깨
탱탱한 엉덩이
일본어
영어
아이스크림
주름 진 미소가 보기 좋은 아저씨
여유
근육질 탄탄한 몸은 매일 운동하면 돼.
일본어랑 영어도 매일 말하면 돼.
근육질이랑 외국어는 어떤 과정의 찰라야.
그래서 그냥 계속, 매일, 뭘 하면 돼.
그런데 여유는 달라.
여유는 어떤 과정의 찰라가 아니야.
계속, 매일, 여유를 부리면, 여유가 커지는 게 아니야.
계속, 매일, 여유를 부리면, 여유를 부릴 수 없게 돼.
내가 바라는 여유는, 일확천금 이후에 주어지는 어떤, 소강상태에 가까워.
추성훈은, 지금까지, 매일, 운동하면서, 돈을 벌었지.
천금을 일확한 게 아니야. 천금을, 조금씩, 천획, 만획 한 거지.
나는 지금의 추성훈의 상태가 부러워.
그런데 안타깝게도 추성훈의 상태는 일확할 수 없어.
그의 몸, 언어, 재정은 일확의 대상이 아니야. 천획, 만획의 대상이지.
결국, 그의 상태를 부러워하면서 그의 천획, 만획을 거부하면 영원히 괴리에 갇히게 돼.
예쁘거나, 잘 생기면, 편한 이유가,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그 순간을 담아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소비해.
그럼, 다른 사람들이 소비할 무언가를 만들어 내면, 예쁘거나 잘 생긴 사람들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겠네.
그런 게 아니라면, 계속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야 해. 커피를 만든다거나, 상담을 해준다든가.
벽을 맞딱드린 느낌이다.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했던 말을 살짝 응용하자면, 어떤 알 속에 갖혀 있는 느낌이다.
뉴스는 계속 어떤 이야기를 퍼서 날라주는데, 나의 이야기와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 뿐이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아무도 알려줄 수 없나 보다.
열심히 하면 열정이 생긴다는대, 내가 바라지 않았던 열정이 생길 정도라면 내가 바라던 무언가를 대가로 지불했을 것이다. 나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무엇인지 모른 채일 수도 있고, 뒤늦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도 할 것 같다. 하여튼 어떤 경우라도 어쨌든 해롭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언제가 도움은 되겠지. 다만, 어디까지나 도움이 될 정도지, 나의 삶의 주축이 될 정도는 아니다. 내 삶의 주축이 먼저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무얼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확신이 없다. 변화가 굉장히 느리기 때문일까.
만 명의 사람을 만나면 만 개의 길을 보거나 듣게 될 거고, 그 중에는 내가 혹할 만큼 충분히 성숙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때마다 나는 조급함을 느낄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느끼는 조급함은 ‘자연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말은, ‘A라는 상태에 놓이면 B라는 감정을 느낀다’처럼 미리 프로그래밍 된 기전에 따른 감정이라는 말이다. 단 걸 입에 넣으면, 단 맛을 느끼는 것처럼.
그런데, 내가 느끼는 조급함이, 조바심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인식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다음 주에 고객사에 가야 하는 사실 때문일까. 내가 느끼는 조급함은 사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일까. 다음 주 수요일이 되면 이 조바심은 사라지게 될까.
비트코인 가격이 주춤한 것과, 고객사에 가야 하는 것과, 다른 사람의 성숙한 모습이 나의 마음에 조급함을 불러일으키고서 똬리를 튼 것일까.
막춤 루틴이 조금 깨진 것도 영향을 주었을까.
나는 도대체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나의 루틴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내가 먹고 살 만큼의 충분한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삶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진리’인 것 같다. 아무도 삶이란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채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무엇인지 모른 채로 태어난다.
그래서 나처럼, 삶이 무엇인지 알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삶을 모른다. 그렇다고 몰라도 된다는 건 아니다. 모른 채로 시작할 뿐이지, 모른 채로 살아가다가 모른 채로 죽으라는 건 아니다.
모른 채로 시작해도 된다는 말의 근거로 쓰일 정도는 될 거 같다. 살아가는 데 ‘삶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수였다면, 우리는 삶을 안 채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 외에는 모르겠다. 인생의 목표가 삶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삶이 무엇인지 모른 채 죽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건 당장의 연명에 효과적이다. 일단은 명을 연장해야 하나보다. 연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명에 의미를 둔다면, 연명하기만 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연명에 의미를 둔다면, 사실 아이러니 하게도 연명은 무의미하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지금까지 죽은 모두의 삶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연명에 의미를 둔 삶도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의미 없는 연명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연명(延命)을 그저 도구로 절하하고, 그 도구로 할 어떤 것에 의미를 두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그래. ‘삶은 이렇더라’ 말해주는 인생을 살자.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거기에 둔다. 삶은 이렇더라.
그러기 위해서는 탐구비 명목의 자원이 필요하다. 삶을 목격하고 탐구하려면 시간이 필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연명(延命)해야 한다. 일도 해야 한다. 노동의 긴장을 놓고서 인생을 논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절대적인 탐구와 목격의 시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 시간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 최소한의 삶을 연명할 정도의 노동이면 충분하다.
삶의 현상을 나열하면 될까. 내가 삶의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애초에 답이 있기는 할까.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삶을 모른 채로 죽는 사람들이 다수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삻에 답이 있다면, 답을 알고 있던 자와 모르던 자의 죽음에 차이가 없다는 건데, 받아들이기 힘들다. 삶에 답이 있다면, 교육의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연명수단을 수월하게 확보하게끔 만드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삶에 답이 없다면, 그냥 어영부영 살아온 사람이, 술 자리에서, 삶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과, 삶을 열심히 탐구해 온 사람이 말하는 것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탐구하는 삶의 의미가 있나?
있다. 연명수단이 아니라면, 삶의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도 ‘삶이란 어떤 것이다’라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어느 정도보다는 조금 더 아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나는 태도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목격하고 탐구하는 것에 의미를 둔 삶과 연명수단에 의미를 둔 삶은 비록 ‘삶을 아는 것’에 큰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삶의 모양’은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목격하고 탐구하는 삶이 어떤 것일지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 그래서 두렵다. 그래서 이 길이 옳다. 많은 진리가 두려움이라는 장막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두려움을 느낀다면, 대체로 그 길은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3,650만 원. 내가 1년을 연명하는 데 대가로 지불할 액수다. 7억 원을 배당수익률 5%인 곳에 투자하면 배당으로 평생을 확보할 수 있다.
7억 원이 뉘 집 개 이름인가…
물론, 최소한의 연명 수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재화를 얻을 수 있는 노동은 할 생각이기 때문에 7억 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투자를 하지 않을 이유가 되지 않는다. 솔직히, 3,650만원 어치의 노동을 한다면 지금의 생활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자본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 자본이 7억 원에 가까우면 가까울 수록, 최소한의 노동의 크기가 줄어들 뿐이다.
물론, 7억 원이 넘는 자본이 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노동은 유지되어야만 한다. 다만, 노동의 종류가 달라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배당수익률 5%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3%면 수월하게 달성할 거 같고, 4%도 꽤 힘겨울 것처럼 보인다. 코카콜라가 2.7%인데, 매년 주가가 오른다고 하더라도, 5년은 지나야 3% 수익률이 될 거 같다. 즉, 코카콜라의 배당수익률이 마지노선일 수도 있다. 주가가 오르면서 배당수익률을 유지하는 마지노선.
내가 35세, 40세, 45세, 50세…에 어떤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을까.로 돌아가보자.
만 나이로 지금 32살.
3년 뒤에 나는 어떤 사람이면 좋을까.
솔직히 탐구하는 삶을 누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를 것이니, 그 나이에 바라 본 삶도 소중하게 묘사된 채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다.
운동량은 늘었으면 좋겠다. 추성훈처럼 근육질의 몸을 평생 유지하려면, 그에 맞는 운동량도 꾸준히 유지해 주어야 한다. 근육질 몸매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지금 하고 있는 꾸준한 운동은 초석을 다지는 걸로 생각하자. 그릇을 키워 놓는다는 느낌.
35살이면 이제 외국어 하나는 confidently speak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 2 외국어를 시작하겠지.
책도 하나 썼으면 좋겠다. 에세이나 소설. 삶의 철학과 관찰한 것을 녹인 에세이나, 아름다운 세상을 그린 소설? 어느 하나라도 좋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썼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은 생각하지 못 했던 어떤 것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취미든, 일이든, 예술이든. 소비 말고 생산하는 쪽으로.
40세는 3년 뒤에 다시 생각해보자.
아,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도 좋겠다. 세상에 내가 사는 동네에 어떤 골목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힐난하겠지. 연명 수단이 아닌 것에 의미를 두기만 하면 된다.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다.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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