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사색 - 2025년 1월 21일
책을 읽고 사색을 하면서도 조급함과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이것은 내가 예전에 내가 미래의 부유함을 기다리며 살았을 때와 같다. 그때에도 나는 조급함과 답답함을 달고 살았다. 허영을 쫓는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아보겠다고 아둥바둥 하고 있었지만, 나의 태도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미래의 어느 찬란한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현재의 비참함을 유예하며 나의 비참함이 미래의 찬란함에 묻힐 때까지 나의 비참함이 미래의 찬란함을 위해 정당하게 지불된 비용이라는 영수증이 주어질 때까지 나는 지금을 유예하고 있는 것 같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오면서 나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느끼는 순간들은 말 그대로 순간이었지만, 연속된 시간의 어느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성적이 지지부진해 보여도 개념이 쌓이는 동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인데, 개념이 계속 쌓이다보면 어느 순간 성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던 강사의 말이 떠오른다. 진지하게 이 말을 곱씹어 보면, 어느 순간 성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경험은 시험을 보는 날 경험할 수 있다. 성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경험이 어느 순간에 이루어진다고 느끼는 이유는 성적을 확인하는 작업인 시험이 매일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성적을 확인했다면 어느 순간 성적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성적이 폭발하는 '기간'을 경험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개념이 쌓이는 동안에는 성적에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 말은 정말 그런 것 같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한 날부터 매일 모의고사를 봤다면, 어느 기간 동안은 모의고사 점수에 큰 변화가 없었을 것 같다. 시간이 더 지나면 성적이 상승하는 기간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도 나는 공부를 마치 연금술로 받아들여 지냈던 것 같다. 내가 공부한 지식이 어느 순간 제대로 조합되어 훌륭한 결과물을 뿅 하고 만들어 내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공부했던 것 같다. 그 때도 역시 조급함과 답답함을 달고 살았다.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온 게 분명하다. 나에게 안정과 자유를 가져다 줄 순간. 나에게 여유와 부유를 가져다 줄 순간. 대학에 합격하는 순간. 시험에 합격하는 순간. 나에게 깨달음을 가져다 줄 순간.
물론 대학과 시험에는 합격했다. 미래의 어떤 순간을 기다리며 산다는 것 자체가 그릇되고 거짓되어서 그 어떤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그 바라는 순간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순간이 오기까지 조급함과 답답함을 달고 살아야 하고 그로 파생되는 온갖 부작용은 거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순간을 기다리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 자체가 본질을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돌이켜 보면,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 주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주체는 어떤 꾸준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수험 기간 내내, 합격하는 순간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조급함과 불안함과 답답함이 끊이지 않았다. 그로 파생되는 고통을 친구 삼아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낀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공부를 '해나갔기 때문'에 합격의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수험 기간 동안 매일매일을, 그 하루에 할당된 지식을 쌓는 것에 초점을 맞췄더라면, 덜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조급함과 불안함과 답답함이 차지했던 마음 속 공간을 다른 좋은 감정들로 채워놓고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왜 그날 하루의 해야 할 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미래의 어느 순간에 초점을 맞췄을까. 불안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 맞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이대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불안했던 것 같다.
올바른 방법으로 공부해야 하는데, 내가 하는 방법이 맞느냐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불안했던 것 같다. '내가 하는 방법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미래의 어느 순간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내가 하는 방법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나는 그 하루를 그 방법대로 보냈는가에 주목했을 것 같다.
결과를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합격과 불합격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시험 점수를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험 점수를 올릴 수 있다'는 문장이 참이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내가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시험 점수를 올리'는 부분이 아니라, '공부를 열심히 해서' 부분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내가 진실로 할 수 있는 부분은 깨달음을 얻는다는 부분이 아닐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뭘까.
내가 원하는 결과는, 내가 기다리는 순간은 연속된 시간의 어느 한 부분이다.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과 시험에 통과하는 순간은 수험 기간의 끝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조급함을 느끼든 답답함을 느끼든 초조함을 느끼든, 그래서 그 기간이 고통스럽든 아니든, 상관없이 어쨌든 내 수험 기간은 공부로 채워졌기 때문에 그 기간의 끝이 내가 원하는 순간이 되었던 것이고, 그 기간 동안 내가 했던 행동은 필요한 지식을 축적하는 공부라는 행위였다.
그렇다면 본질은 연속된 시간 동안에 무엇을 축적하는냐이다. 이 문장에서 상수는 연속, 시간, 동안, 축적이고 변수는 무엇이다. 내가 깨달음을 원한다면 깨달음의 재료인 그 무엇을 연속된 시간 동안 축적하면 될 것이다. 내가 부유함을 원한다면 부유함의 재료인 그 무엇을 연속된 시간 동안 축적하면 될 것이다. 내가 건강함을 원한다면 건강함의 재료인 그 무엇을 연속된 시간 동안 축적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연속된 시간 동안 내가 조급함을 느끼든 여유를 느끼든 답답함을 느끼든 평안함을 느끼든 초조함을 느끼는 느긋함을 느끼든 고통을 느끼든 즐거움을 느끼든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여유와 평안함과 느긋함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연속된 시간 동안 축적에 초점을 맞추면 되지 않을까?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삶의 변화에 필요한 재료를 연속된 시간 동안 축적하면 되지 않을까? 삶도 어떤 연속된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 한다면, 아니 어쩌면 그 연속된 시간을 삶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원한다면 지금까지 축적했던 것 대신에 다른 무언가를 축적하면 되지 않을까?
결국 내가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것을 축적해야 변하는 것 아닐까. 지금까지 나는 독서하는 행위를 축적해본 적이 없다면, 독서를 축적하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변하지 않을까? 운동도 그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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