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유시민
- 출판
- 생각의길
- 출판일
- 2013.03.13
📚 이 책을 고른 이유
우연히 유튜브에서 세바시 영상을 보았다. 유시민 작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유시민 작가의 대답을 담은 10분 남짓 길이의 영상이었다. 나는 유시민이라는 사람을 '정치인'으로 알고 살았다. 그런데 이 영상 속 유시민은 '구조자' 내지 '철학자'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지고 살아가는 질문과 똑같은 질문의 영상이지 않는가.
그 10분 영상에서는 유시민 작가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일목요연하게 삶의 의미를 정의했다. 그래서 너무 궁금했다. 이런 요약을 어떤 책에 보다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검색을 해보니 정말로 책이 있었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 인상 깊은 구절들
내 자신의 욕망을 더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삶을 얽어맸던 관념의 속박을 풀어버렸다.
원래의 나, 내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나답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지도 않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을 물질이나 지위, 사회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청년기의 핵심 과제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꼭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 문제는 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무엇인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었다. 인생을 어떤 색조로 꾸미고 싶다는 소망도 없었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했을 뿐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내게 맞고 오르는 것이 즐거운 나무라면 된 것 아니겠는가.
가진 돈이 많은데도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탕진한다.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어둔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운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에야 비로소, 자신이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허무하게 깨닫는다.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 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삶은 훌륭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또다시 흔들리는 삶 앞에서 번민하게 되었다.
💭 나의 사색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과 『황야의 이리』를 통해서 외부의 도덕적 관념을 따르는 삶은 나를 속박하고 구속하는 일이라고 했다. 내 안의 욕망, 내 안의 본질을 찾아내고 발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도 『월든』에서 내 내면을 탐구하는 여정을 반드시 떠나야 한다고 했다. 내 안의 콜롬버스가 되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신대륙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 사는 '나'를 발견해 내야한다고 한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의 파커 j. 파머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각각의 고유한 자아를 부여받고 세상으로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타인의 시선과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나기 때문에 진실된 자신을 잊고 산다고 한다. 결국 나 자신을 찾으려면 외부의 시선, 도덕적 관념 같은 것들을 잠깐 꺼두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지금 나의 삶의 토대일 지라도 일단, 그것들을 멀리해봐야 '진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유시민 작가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 자신의 욕망을 더 긍정적으로 대하게 되었다. 마음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삶을 얽어맸던 관념의 속박을 풀어버렸다.
원래의 나, 내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나답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인생에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유시민 작가는 크라잉넛 멤버들의 삶을 축복한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스스로 설계했고 그 삶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하지만 대학생 시절 유시민 작가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고 한다.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지도 않았고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나도 인생을 스스로 설계한 적이 있었나? 공부할 때에는 그랬던 것 같다. 매일 할 일을 계획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그 외에는 나의 삶을 스스로 설계한 적이 없었다. 사회적 시계가 알람을 울려대면 나는 그에 맞는 일을 했다. 그 시간에 어울리는 일을 했다. 사실 그 시간에 어울리는 일이란, 내가 어울리다고 정의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이미 정해놓은 일이었다. 남들의 눈에,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꼭 맞는 일이었다. 내가 계획하고 내가 어울린다고 판단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의 삶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았나? 아니? 나는 부모님이, 선생님이, 목사님이, 주변 사람들이 옮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다. 내가 생각하는 옳은 방식은 단 한번도 나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 한번도 태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라고 누구 하나 나에게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이게 중요하다고 말해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모를 수 밖에.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본 적이 얼마나 될까. 학생시절에 학교가 끝나면 피시방에 달려가 게임을 하는 것 정도를 예시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 외에 내가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본 적이 있을까. 없다. 그래서 나는 꽤 오랫동안 매일 밤 잠에 들면서 '아, 오늘 죽었으면 좋겠다' 내지 '아,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더 살아서 뭐하냐'는 식의 생각을 했다. 삶이 보람찼고 나의 의무를 다 했다는 해방감이 아니라 삶이 덧없고 살아봤자 의미가 없다는 허무를 표현한 것이다.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식의 바람을 표현한 적은 언제였을까.
스스로 인생을 설계하지도 않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지 못했다. 죽을 때까지 이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돈, 명예, 권력, 지위가 중요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부모님은 내가 돈이 많거나 명예롭거나 권력을 쥐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보는 것 같다.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 모두 그러하다. 돈 많이 버세요라는 말을 많이 해주신다. 그런데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에픽테토스, 아리스토텔레스,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 파커 j. 파머 등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단 한번도 해주지 않은 말을 해준다. 그것이 틀렸다고.
유시민 작가가 축복하는 크라잉넛 멤버들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을 돈, 명예, 권력, 지위에 두지 않고 오로지 '내면의 소리'에 두었다. 나의 본질에 맞는가. 나의 본성에 맞는가. 그것에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 겠다는 삶을 살고 있다. 유시민 작가는 청년들의 핵심 과제를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일을 찾지 못 했고, 그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크라잉넛 멤버들은 인생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을 물질이나 지위, 사회 통념이나 타인의 시선, 어떤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두었다.
청년기의 핵심 과제는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위로가 되는 것은 유시민 작가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적에 놓여봤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모른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유시민 작가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나는 잘 모른다. 나는 잘 적응했다. 유시민 작가가 그러하듯. 그래서 문제다. 내게 꿈이 없다. 인생을 어떤 색깔로 칠하고 싶은지 모른다. 나의 삶인데도 내가 모른다.
문제는, 꼭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 문제는 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무엇인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없었다. 인생을 어떤 색조로 꾸미고 싶다는 소망도 없었다. 그저 현실에 잘 적응했을 뿐이다.
유시민 작가는 최선을 다해 살아왔으니 후회는 없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매일 밤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회의를 신에게 기도로 보낸 이유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의미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더 살기 싫습니다. 이제 그만 불러주시죠. 이렇게 기도했던 것 같다.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 전재산을 잃고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허영을 좇다가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이반 일리치는 그 절벽에서 빛을 보았지만 다시 그 절벽을 올라가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기회는 없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이반 일리치처럼 절벽 밑으로 곤두박질 쳤지만, 나에게는 기회가 있다. 절벽을 오르고, 돌아온 길을 되돌아가 다른 길로 뛰어가는 것. 나는 이 기회를 잡아야만 한다. 내 안의 무엇인가가 그렇게 욕망하고 있다. 유시민 작가는 나에게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의 표현을 빌려 쓴 유시민 작가의 말은 이러하다.〈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자기 결정권’이란 스스로 설계한 삶을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이며 권리이다.〉수 많은 고전들이 하는 말과 똑같다. 내 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본성에 따라 살아아. 자기 방식대로 살아라. 나는 부모님이, 선생님, 사회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았다.
유시민 작가도 이 책에 본인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적었다.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의미와 기쁨을 느끼고 싶다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싶다고 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사는 것. 하지만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아닌 것. 그리고 세상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는 것. 그 과정에서 나도 더 훌륭하게 되는 것.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을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일이다.'라고 말한 것이랑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면서 그것이 남에게 도움이 되고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삶은 정말 축복 받은 삶일 것 같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기쁘게 살아가는데 남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 일을 평생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만약 오늘 신이 내게 찾아와서 하루에 한 번 씩 푸쉬업을 20번하면 어느 한 사람의 병이 완전히 나을 것이야.라고 한다면 나는 죽는 날까지 하루에 푸쉬업 20번을 꼭 하지 않을까?
책을 읽다가 파커 j. 파머와 유시민 작가가 똑같은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에서 파커 j. 파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주의는 독이라고 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유시민 작가고 세상에는 오르지 못 할 나무가 너무나 많다고 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와 넘을 수 없는 벽에 매달려 인생을 소모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신경 끄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라. 나의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세상에 오르지 못 할 나무를 오르는데 인생을 소모하게 된다면, 내가 오르지 못 하는 나무를 오르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만 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지 않을까? 크라잉넛처럼 내게 적합한 나무를 오르면 다르지 않을까.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을 거고, 열등감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나를 비하하지도 남을 비하하지도 않겠지.
내게 맞고 오르는 것이 즐거운 나무라면 된 것 아니겠는가.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들이 많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나오는 어떤 농부도 계속해서 더 넓은 땅을 욕심내다가 결국 자기 키만큼의 땅에 묻혔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게 얼마큼의 땅이 필요할까라는 질문에 딱 자기 키만큼이라고 답한 것 같다. 더 넓은 땅을 바라다가 지금 가지고 있는 땅으로 느끼는 기쁨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땅을 알았더라면, 그 농부의 이야기는 희극이 되지 않았을까. 이반 일리치가 죽음 앞에서 깨달은 자신의 허무한 삶도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가진 돈이 많은데도 더 많은 돈을 얻으려고 발버둥 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탕진한다. 이미 높은 곳에 있으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오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내일로 미루어둔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묻지 않는다. 그리하여 운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에야 비로소, 자신이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허무하게 깨닫는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이 땅에 왔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어떻게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일까.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각 사람은 각 사람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 자신에 대한 답은 내가 내려야만 한다. 나의 안에서 나의 내면에서 서서히 번져가는 불길을 발견해야 한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는다. 너무나도 작다.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열왕기상 19장 12절
삶의 의미는 사회나 국가가 찾아주지 않는다. 찾아줄 수도 없고, 찾아주어서도 안 된다.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누구도 나에게 답을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각 사람은 각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나의 삶의 의미는 내가 찾아야 한다. 삶의 의미는 찾지 못하면 말 그대로 살아갈 의미가 없다. 삶이 의미가 없다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누구도 타인에게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대신 결정해줄 수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나름의 답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삶은 훌륭할 수 없다.
삶의 의미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삶의 의미를 모른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빵을 먹고 포도주가 몸 속으로 들어간 몸에서 어떤 것이 나올 지는 각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같은 음식으로도 노래를 만들어 내고 춤을 그려낸다. 어떤 사람은 그대로 토해내거나 똥만 뽑아낼 뿐이다. 삶의 의미를 치열하게 생각해 봐야한다. 나의 몸뚱아리가 똥만 뽑아낸다면, 저 나무 밑의 흙과 무엇이 다를까. 내 몸을 산산조각 내어 훌륭한 거름으로 이바지 하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 삶의 의미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유시민 작가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자유로운존재로서 있는 힘을 다해 살고 싶다고 한다. 주기적으로 삶의 회의가 나의 마음에 쳐들어 오는 것은 내가 삶의 의미에 마땅한 대답을 준비해 놓지 못 했기 떄문이다.
알베르 카뮈의 인생을 생각하며 자문해본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은 내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어떤 놀이에서 즐거움을 얻고 살았으며 어떤 놀이를 더 하고 싶은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 만족스러운가? 누구와 함께 어디엔가 속해 있으면서 서로 공감하고 손잡으려는 의지를 충분히 표현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이 지레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산 것은 아니었던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삶에 대한 번민과 회의가 찾아드는 것이리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어떻게 놀 것인가.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 어떤 사랑을 받을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답을 내기 전에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죽음 없이는 모든 게 다 오답이다. 톨스토이가 하고 싶었던 말일 것 같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메시지였던 것 같다. 죽음과 함께 삶에 대해 답을 내어야한다.
유시민 작가 또한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잠정적으로 답을 내었다고 한다.
어떻게 사는 인생이 훌륭할까. 일단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하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자. 그 일을 열정적으로 남보다 잘하자. 그리고 그걸로 밥도 먹자. 이것이 성공하는 인생 아니겠는가.’
나의 삶을 설계할 때 가슴이 설레는지 여부를 봐야한다. 내가 상상한 삶에서 가슴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남이 나에게 심어준 삶일 것 같다. 유시민 작가도 가슴이 설레는 인생을 계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 지 못 했고, 또 다시 번민이 찾아왔다고 한다. 깨달음으로 충분하지 않는 것 같다. 용기가 필요하다. 가슴이 '설렘'이라는 도장을 찍어준 인생 계획을 충실하게 실행해 나갈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먹물’인 게 확실했다. 글쓰기는 유익한 지식, 감동을 주는 정보를 남들과 나누는 일이다. 그런대로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이 정도로 끝내자. 지금껏 배운 것도 적지는 않았다. 이것을 밑천 삼아 죽을 때까지 책 읽고 글 쓰면서 살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설렘이 일었다.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또다시 흔들리는 삶 앞에서 번민하게 되었다.
그런 용기를 가지고 내가 설계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매일은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카뮈가 내게 와서 '너는 왜 자살하지 않니?'라고 묻는다면, 즉각 대답이 튀어나올 것 같은 삶.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삶의 존엄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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