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사색 - 2025년 1월 24일

『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를 읽는 중간에 어둠이 내게 주는 무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도 우울증을 앓았을 때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 빨려들어가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한계를 보았다고 해야 맞는 것 같다.

나도 엄청나게 우울한 때를 보낸 적이 있다. 2023년 5월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극심안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겪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 싶어 사표를 낸 적이 있었다. 사실 냈다기 보다는 사표를 내러 팀장님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사표를 들고나오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내 첫직장을 끝내려고 했었다.

왜 그랬을까. 이 책을 읽고서 뿐만 아니라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를 읽을 때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다. 내가 그 당시 내 상사들에게 분노했고 내 자신에게 화가 났고 미래를 극도로 불안하게 느꼈던 원인들을 차근차근 하나씩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 그 때 나는 내가 해보지도 않았던 일의 책임자가 되었다.

두 번째, 그 때 나는 그 일 외에도 두 가지의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 하나는 회사 내의 부트캠프 교육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습 2년차 시험 준비였다.

세 번째, 내가 해보지도 않았던 일이었기에 고객이 원하는 수준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그 업무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야 할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그 절대적인 시간이 명백하게 부족했다.

네 번째, 고객이 원하는 수준의 결과물은 해당 업무를 수행해 본 경력이 있는 만 5년 차 이상의 회계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된 것이었다. 실제 계약서에도 해당 업무를 수행해 본 경력이 있는 만 5년차 이상의 회계사를 책임자로 보낸다고 되어있었다.

다섯 번째, 나는 만 2년도 채 채우지 않았던 수습 회계사였다.

여섯 번째, 내가 이 일의 책임자가 되기 직전에 다른 회계사가 책임자였으나, 우리 팀으로 전출을 온 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이었고 이 사람 또한 만 5년을 채운 회계사도 아니었으며 해당 업무와 아예 무관한 부서에서 업무를 하던 회계사였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 업무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퇴사했다. 그리고 바로 내가 대신 투입되었다.

일곱 번째, 나는 이 일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 번이나 담당 파트너에게 일을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물론 여기에서 직설적으로 못 하겠다 내지 안 하겠다고 말하지 못 한 나의 잘못이 일부 있다고 생각한다. 완곡히 말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밉다.

여덟 번째, 회사는 내가 부트캠프 교육을 받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었으며, 내가 2년차 수습 공인회계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나에게 이 업무를 책임자로서 수행하라고 말했다는 것은, 내가 다른 일과 병행하여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판단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판단에 따라 그 업무를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아홉 번째, 부트캠프와 2년차 시험과 그 업무를 동시에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회사가 판단하기에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그 업무를 수행하지 못 했다는 자각은 나로 하여금 내가 회계사로서의 역량이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열 번째, 역량이 없는 내가 회사를 대표해서 고객사에 나가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 극도의 불안을 주었다. 일을 수행해 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과 나를 믿어준 회사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열한 번째, 자살을 생각했다가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약물 치료와 심리 치료를 시작했지만, 단기간에 당장 내게 주어진 업무들을 해낼 수 없다는 현실이 버거워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열두 번째, 그래서 나는 일단 우울증 진단서를 첨부하여 회사에 병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극심한 불안으로 병가고 뭐고 이 지옥에서 나가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사표를 써서 팀장을 찾아갔다.

그 때 내가 느꼈든 수치심을 헤르만 헤세의 표현을 빌어보자면 다름과 같다. 나는 돈을 위해서 권력자에게 몸을 팔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내가 판 게 아니었다. 그들이 돈을 위해서 권력자에게 내 몸을 팔았다.

그 때 담당 파트너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이 업무는 우리 팀의 주된 업무도 아니고 중요한 업무도 아니다. 이런 일 우리가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큰 일이 아니므로 너무 스트레스 받을 필요없다는 뉘앙스로 위로해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안 해도 상관없는 일에 몸이 팔렸다. 내 전임자는 안 해도 되는 일 때문에 퇴사했다.

가난하여 빵을 얻기 위해 고통을 겪었던 젊은 시절에, 그가 즐겨 배고픔을 참고 찢어진 옷을 입고 지낸 것도 약간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돈을 위해서나 여유 있는 생활을 위해서나 여자나 권력자에게 몸을 판 일이 없다. 세상사람들의 눈에는 이익과 행복으로 보이는 것을, 그는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수백 번이나 포기하고 거부했다.
헤르만 헤세, 황야의이리 (48page)

일단 그들이 나빴다라고 치고 이제 이 문제와 나만 남겨놓고 생각해보고 싶다. 나는 이 일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무엇을 원할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내 지식과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반대로 내가 모르지만 마치 아는 것처럼 꾸밈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는 도저히 못 하겠다. 억만금을 준다해도 나는 못 하겠다. 나는 권력자에게 몸을 팔지 않겠다. 내 의지로도 아닌 채 몸을 팔려봤는데, 죽음만이 평안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느껴지는 기간이었다. 비겁한 수단이 유일한 수단으로 느껴지게 하는 경험이었다.

실력을 키워야겠다. 알고 있는 지식을 더 견고하게 하고 더 넓은 지식을 탐구하고 정리해서 널리 알리겠다. 그것이 타인들에게 지혜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자유를 누리게 하고 싶다. 거창하다면 그냥 내 지식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높이기 위해서 공부하고 탐구하고 싶다 정도로 만족하고 싶다.

열세 번째, 갑자기 기억이 났다. 그 세 가지 일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내가 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는데, 지방청과 구청들에서 나에게 전화가 왔다. 지방세 경정청구 때문이라는데 나는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데 내가 책임자로 그들에게 전해졌단다. 5~6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내가 모르는, 내가 한 적 없는 일을 설명해야 했다. 아직도 왜 지방청과 구청들이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는지는 의문이다. 그 때 어떻게든 대응해보려고 퇴사자가 남기고 간 클라우드 파일을 구석구석 찾아보던 기억이 났다. 거기에 관련된 파일이 있었는데 그냥 있었다 정도의 의미만 있는 파일이었다. 그 파일로 전후 사정을 추론하고 대응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아는 것으로 도움을 주고, 내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정직함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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