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완역본)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결과를 이끌어낸다. 그것은 나의 반항, 나의 자유, 나의 열정이다.” 《시지프 신화》는 1942년에 발표한 카뮈의 대표작 중 하나로, 철학적 문제작 《반항하는 인간》에서 추구했던 개념을 처음 알린 작품이자 소설 《이방인》의 사상적 토대가 된 작품이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살인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처럼, 《시지프 신화》에서는 자살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다만, 그는 현대 유럽에서 일시적으로 부재하거나 왜곡되어
저자
알베르 카뮈
출판
올리버
출판일
2024.09.19

📚 이 책을 고른 이유

유시민 작가가 쓴 두 권의 책을 읽었다. 그런데 두 책에서 '카뮈'에 대한 인용 문구가 나왔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카뮈가 누구인지, 어떤 철학을 가진 사람인지. 그래서 Claude에 물어봤다. 여러 책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중에서 카뮈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책이 '시지프 신화'라고 했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읽어나가다가 후회했다. 책장이 넘어갈 수록 내용이 너무 난해했다. 카뮈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단어와 단어가 따로 놀고 있는 느낌이었다. 문단과 문단이 독립적인 섬으로 느껴졌다. 결국 완독은 했지만 읽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Claude와의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시지프 신화에 담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읽어보았는데,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전에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 인상 깊은 구절들

인간에게 진정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바로 자살뿐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문제는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문제와 같다.
자살은 그저 삶에 ‘고통을 감당할 가치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다시 출발지로 돌아왔다. 과학적인 방식으로 현상을 포착하고 열거할 수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현재로서는 부조리만이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다.
‘부조리하다’는 말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모순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삼위일체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를 파괴하는 것은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을 내맡기는 데서 자유를 찾는다. 이들은 자신의 신에게 몰입하고 신의 규율을 받아들임으로써 은밀하게 자유로워진다. (중략) 하지만 이런 자유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과 관련해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일 뿐, 실제로는 자유롭다기보다는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치명적인 도피이자 회피의 전형적인 행위는 바로 희망이다. ‘자격을 갖추어야’ 얻을 수 있는 내세에 대한 희망이나, 삶 자체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초월하고, 승화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다가 결국 삶을 배반하는 위대한 이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가 이에 해당한다.
오직 죽음(여기서 가장 명백한 부조리로 여겨지는)만으로 향하는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 안에서 단단히 자리 잡은 열정적인 관심 이외의 모든 것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느낀다. 그는 일상적인 규칙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나는 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엄격하게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102page
이제는 운명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의식을 통해 밝혀진 자기 앞의 부조리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 운명을 계속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미래에 대해 희망할수록, 나의 개별적인 진리와 존재 및 창조 방식에 대해 우려할수록, 내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삶에 의미가 있음을 받아들일수록 나는 스스로 장벽을 만들고 그 안에 내 삶을 가두게 된다.
내가 다룰 수 있는 진리는 손으로 만질 수 있다. 이 진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끊임없이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영혼 앞에 놓인 현재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재,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이상이다.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입장은 곧 반항이다.

 

DALL-E, 매일매일 반항해라. 유일한 무기는 열정이다.


💭 나의 사색

알베르 카위가 하고 싶었던 말은 왜 자살하면 안 되는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자살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는 없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야 말로 철학자들이 반드시 이루어 내야할 과제인 것 같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굉장히 난해하다 보니 인과 관계와 같은 논리의 연결을 너무 자주 놓쳤다. 그래서 카뮈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한 느낌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한 것 같다. 그래서 사색을 이어가기로 했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바로 자살뿐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문제는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문제와 같다.

예전에 삶에 의미가 없으면 살지 않는게 맞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그 생각이 더 강화되었다. 카뮈도 '자살은 그저 삶에 고통을 감당할 가치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기 때문에 삶에서 고통 외의 무언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굳이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살에 대한 뉴스를 읽을 때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그들이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자살은 그저 삶에 ‘고통을 감당할 가치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나 또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삶의 득실을 따져본 적이 꽤 있다. 고통을 비용으로 치환하고 어떤 것을 이익으로 치환하여 내가 과연 삶을 사는 것이 득인지에 대한 고찰이었다. 하지만 고통의 크기도 모르겠고, 고통의 대가 얻는 무언가가 나에게 주는 기쁨의 크기도 모르겠어서 그 고찰은 망상으로 끝났다. 그러나 카뮈는 그 고찰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하나의 책으로 완성해 낸 것 같다.

카뮈도 언젠가 과학을 통해 삶을 이해하려고 했나보다. 양자역학을 통해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과학은 삶이 이렇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현상을 포착하고 열거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깊은 성찰을 제공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다시 출발지로 돌아왔다. 과학적인 방식으로 현상을 포착하고 열거할 수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삶은 고통일까.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 삶이 왜 고통인지에 대한 답을 얻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삶은 고통이라는 것이 명확한 사실이라는 것에서 출발하여 나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주었다. 삶은 고통이기 때문에 누구는 자살을 하고 누구는 회피를 한다. 그리고 누구는 반항을 한다. 사람이 원하는 것이 있는데 우주는, 자연은, 신은 그것을 주지 않는다. 이런 긴장과 대립을 카뮈는 '부조리'라고 표현했다.

부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 같다. 카뮈는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가 있는데 그것이 부조리라고 했다. 부조리는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고 모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삶 자체가 고통인 것 같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세계는 거부한다. 우리가 외치는 질문에 세계는 침묵한다. 그것이 부조리고, 그래서 우리는 고통스럽다.

현재로서는 부조리만이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다.
‘부조리하다’는 말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모순이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부조리가 세계와 인간의 사이에 존재한다. 카뮈는 이것을 삼위일체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삼위일체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붕괴한다. 자살은 그런 것이다. 자살은 인간과 세계과 부조리 중에서 인간을 부정함으로써 이 관계를 붕괴시킨다. 카뮈는 인간의 존엄은 도전에서 나온다고 한다. 불가능함에도 도전하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자살은 부조리한 상황에 놓여있는 인간이 답할 수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오답이다.

삼위일체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특징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를 파괴하는 것은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조리를 희망으로 승화한다. 종교적인 어떤 것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신에 의지한다기 보다는 신의 뜻이 이러할 것이다라는 것에 의지하는 것 같다.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카뮈는 말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을 내맡기는 데서 자유를 찾는다. 이들은 자신의 신에게 몰입하고 신의 규율을 받아들임으로써 은밀하게 자유로워진다. (중략) 하지만 이런 자유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과 관련해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일 뿐, 실제로는 자유롭다기보다는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리 중에서 가장 명확한 부조리는 '죽음'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하고 싶지만, 세계는 인간에게 죽음을 예외 없이 선사한다. 그런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다. 포기하는 것, 회피하는 것, 저항하는 것. 자살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는 것이다. 종교적 희망으로 삶의 부조리를 부정하는 것은 회피하는 것이다. 저항하는 것은 죽음을 인지하고 대면하여 진정한 자유를 살아가는 것이다.

치명적인 도피이자 회피의 전형적인 행위는 바로 희망이다. ‘자격을 갖추어야’ 얻을 수 있는 내세에 대한 희망이나, 삶 자체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초월하고, 승화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다가 결국 삶을 배반하는 위대한 이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가 이에 해당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마침내 죽음으로 귀결되는 우리 인간은 자유로운 상상과 행위를 통해 죽음에 반항해야 한다. 자기 안에 단단히 자리 잡은 열정적인 무언가에 집중하여 몰입하는 것으로 죽음에 반항해야 한다. 내 안의 열정적인 관심 외의 것에서 해방되고, 일상적인 규범과 규칙으로부터 자유를 누린다.

오직 죽음(여기서 가장 명백한 부조리로 여겨지는)만으로 향하는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 안에서 단단히 자리 잡은 열정적인 관심 이외의 모든 것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느낀다. 그는 일상적인 규칙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세상은 이기적이다. 자신만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것이다. 특혜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정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사람들에게 같은 양의 경험을 제공한다.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 이 사실을 의식해야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 자신의 반항, 자신의 자유를 최대한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수로 들어간 이유일 것이다.   

나는 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엄격하게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102page
이제는 운명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의식을 통해 밝혀진 자기 앞의 부조리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 운명을 계속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부조리를 눈 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할까. 자살도 희망도 답이 아니라고 한다. 미래를 희망할 수록 나 스스로 더 높은 장벽을 쌓아 내 삶을 가두어 버린다고 한다. 현재.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 오늘은 반항으로 채워야 한다. 내가 갈망하는 것으로 하루를 채워야 한다. 세상이 그것을 절대로 나에게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더라도 나는 반항해야 한다. 저항해야 한다. 죽음과 부조리를 대면해야 한다. 정직하고 솔직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죽음과 부조리에 대항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무기는 내 안에 있는 열정이다. 내가 다룰 수 있는 무기는 열정 뿐이다. 나는 이 열정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내가 미래에 대해 희망할수록, 나의 개별적인 진리와 존재 및 창조 방식에 대해 우려할수록, 내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삶에 의미가 있음을 받아들일수록 나는 스스로 장벽을 만들고 그 안에 내 삶을 가두게 된다.
내가 다룰 수 있는 진리는 손으로 만질 수 있다. 이 진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끊임없이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영혼 앞에 놓인 현재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재,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인간의 이상이다.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입장은 곧 반항이다.

✍️ 마무리 생각

내가 삶의 의미를 알려달라고 소리쳐 봐도 소용 없다. 세상은 나에게 답해주지 않는다. 유시민 작가가 말했던 것과 같다. 나에게 주어진 의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찾을 수도 없다. 부조리다. 내가 나를 정의해야 하고 내가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포기나 회피는 답이 될 수 없다. 나를 가장 존엄 있게 존재하게 하는 것은 저항이고 반항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오늘을 박탈하는 것은 회피다. 오늘의 부조리를 오늘의 열정으로 공격해야 한다. 미래는 없다. 미래에 주어질 달콤한 자유는 허상이고 허영이다. 칸트의 두 번째 정언명령과도 위배된다. 내가 어떤 목표를 설정하면 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나의 존재 이유는 오직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나의 목표는 나여야만 한다. 나는 무엇인가.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선 나약한 존재이다. 나를 목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부조리 앞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에서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로 죽음을 찌르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창은 열정이다. 내 안에서 나의 고유한 열정을 찾아내야 한다. 죽음과 부조리를 찔러내면서 하루를 살아야 한다. 하루하루가 공격이고 버팀이다. 미래는 없다. 오늘만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삶에서 어떤 목표를 설정하면서, 이루어야 할 목표의 요구사항에 자기를 끼워 맞추고 자기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내가 미래에 대해 희망할수록, 나의 개별적인 진리와 존재 및 창조 방식에 대해 우려할수록, 내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로 인해 삶에 의미가 있음을 받아들일수록 나는 스스로 장벽을 만들고 그 안에 내 삶을 가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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