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100쇄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2016년 출간된 이후 국경을 초월해 수많은 한국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가 2024년 겨울, 드디어 100쇄 기념판을 선보이게 되었다. 신경외과 의사로서 치명적인 뇌 손상 환자들을 치료하며 죽음과 싸우다가 자신도 폐암 말기 판정을 받고 죽음을 직면하게 된 서른여섯의 젊은 의사 폴 칼라니티. 그가 써내려간 마지막 2년의 기록인 《숨결이 바람 될 때》는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아마존과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
저자
폴 칼라니티
출판
흐름출판
출판일
2024.11.22

📚 이 책을 고른 이유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삶을 논할 수 없다고 들었다. 많은 책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대표적이다. 여러 철학자들도 똑같은 말을 했다. 세네카도 그랬고, 알베르 카뮈도 그랬다. 유시민 작가도 그의 책에 똑같은 말을 썼다. 톨스토이와 헤르만 헤세 또한 죽음을 이야기 했다. 그래서 찾아보았다.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직접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짜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순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봤다. 죽기 전에 남긴 말들 글들을 찾았다. 고명환 작가는 죽음을 경험했다가 살아돌아왔다. 죽음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진짜로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책을 발견했다. 많은 깨달음을 준 책이다. 폴 칼라니티라는 이름을 기억해야겠다. 

깊은 깨달음을 얻은 책이다.   

 

💫 인상 깊은 구절들

인간은 유기체이고, 물리 법칙에 복종해야 하며 슬프게도 그 법칙에는 엔트로피의 증가도 포함되어 있다. 질병은 분자의 탈선에서 비롯된다. 삶의 기본적인 요건은 신진대사이며, 그것이 멈추면 인간은 죽는다.
우리는 뇌 덕분에 인간관계를 맺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그러나 때때로 뇌는 망가져버린다.
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하기 때문에,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처하는 비법은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漸近線)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나는 죽음과 마주한 채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했다.
몸 역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고통스러운 요통이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피로와 메스꺼움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서로 다른 자아로 살아간다.
내 경험을 언어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밍웨이 역시 비슷한 형태의 저술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풍부한 경험을 하고 충분히 사색한 뒤 글을 쓰는 것 말이다. 내게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들이 필요했다.
폴은 글을 쓰면서 희망을 품을 수 있었고, 그 덕분인지 마치 섬세한 연금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유려하게 글을 써내려갔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 될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점심 식사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다.
미래는 이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놓인 사다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가 되어버렸다.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이번에 어떻게 잘 버틴다 해도, 앞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어
폴은 성공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은 시도는 바라지 않아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가망이 없다면, 마스크를 벗고 케이디를 안고 싶어 해요.
불치병에 걸렸어도 폴은 온전히 살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활기차고 솔직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폴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남들을 도우려 했고, 이는 그만이 남길 수 있는 업적이다. 이 책이 출판된다고 해서 그의 죽음이 준 상실감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데에서 의미를 발견했고, 이 책에도 그렇게 썼다.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오랜 시간 씨름했고 이 책은 그 본질적인 영역을 탐구하고 있다

 

DALL-E, I can’t go on. I’ll go on


💭 나의 사색

유시민 작가가 이 책을 읽었을까? 유시민 작가가 했던 말과 이 책의 내용이 일정 부분 동일하다. 아니면 나만 모르는 사실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생물학적인 유기체다. 뇌 역시 생체 기관이기 때문에 물리법칙의 영향 아래있다. 뇌는 철학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문학과 인문을 가능하게한다. 그래서 인간을 알려면, 나를 알려면 문학과 철학 그리고 의학을 알아야 한다. 유시민 작가가 비슷한 말을 했다. 인문과 과학을 알아야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유기체이고, 물리 법칙에 복종해야 하며 슬프게도 그 법칙에는 엔트로피의 증가도 포함되어 있다. 질병은 분자의 탈선에서 비롯된다. 삶의 기본적인 요건은 신진대사이며, 그것이 멈추면 인간은 죽는다.

그런데 뇌는 쉽게 망가진다. 호르몬에 영향을 받고 환경에 영향을 받고 물리적인 충격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뇌 덕분에 인간관계를 맺고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조리다. 또한, 인간은 유기체고 물리법칙의 영향 아래에 있고 물리법칙에는 엔트로피 증가도 포함된다. 질병은 분자의 탈선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삶의 기본 요건은 신진대사인데 그것이 멈추면 우리는 죽는다. 부조리다.

우리는 뇌 덕분에 인간관계를 맺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그러나 때때로 뇌는 망가져버린다.

유시민 작가의 표현을 빌려 거칠게 말하면 나는 뇌라고 할 수 있다. 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한다. 뇌사자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의사다. 신경의학과 의사다. 뇌를 전문으로 한다. 그래서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가족들에게 질문을 한다고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만약 수술이 실패해서 뇌가 고장나게 된다면 그 이후의 삶은 수술 이전의 삶과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질문을 한다고 한다.

뇌는 우리가 겪는 세상의 경험을 중재하기 때문에,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정체성, 가치관, 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 얼마나 내가 망가지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의사는 고민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럼 나는? 나는 내가 어디까지 망가지면 스스로 삶을 마감하게 될까. 다리를 못 쓰게 된다면? 팔을 못 쓰게 된다면? 스스로 호흡할 수 없게 된다면? 앞을 볼 수 없게 된다면? 들을 수 없게 된다면? 냄새도 못 맡고 맛도 못 느끼게 된다면? 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 내 안에 존재하는 무엇일까. 내 밖에 존재하는 소유물일까. 나는 어떤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할까. 나는 누구일까.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존엄사에 대한 문제가 떠오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죽음은 늘 승리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불치명에 걸린 중환자다.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것은 연명 치료다. 먹고 자고 싸고 입는 것은 연명 행위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아무리 우리가 멋지고 잘났더라도 우리는 죽는다. 말 그대로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것은 '연명' 치료이기 때문이다.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살고,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유기체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속수무책으로 살아간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의사는 싸운다. 상황이 불리하고 패배가 확실해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운다고 한다. 완벽에 도달할 수 없지만 완벽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부조리다. 완벽에 닿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반항해야 한다. 완벽에 닿을 수 없지만 끝없이 가까워진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에 반항하는 행위다. 인간이 가진 존엄의 모양이 확실하다.    

이에 대처하는 비법은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漸近線)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하지만, 환자는? 몸이 쇠약해지고 꿈꾸던 미래와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된다. 신중하게 계획하고 힘겹게 성취한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몸과 정체성은 병과 죽음 앞에 급격하게 변하는 법이다. 환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환자는 어떻게 부조리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일까.

폴 칼라니티 또한 병이 악화되면서 자신의 정체성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정체성은 뇌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신체도 우리의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신체에 문제가 생긴다면 정체성도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을 앞에 둔 신체와 뇌라면? 그렇다면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찾아야 한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남은 삶을 의미 있게, 가치 있게 보내는 것 뿐이다.

나는 죽음과 마주한 채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했다.
몸 역시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고통스러운 요통이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피로와 메스꺼움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서로 다른 자아로 살아간다.

죽음 앞에서 폴 칼라니티는 더 늦기 전에 아기를 갖기로 했다. 생존을 향한 분투가 생물의 특징이라고 한다. 그는 살고 싶었고 세계는 거부했다. 부조리다. 그는 반항했다. 아기를 갖기로 했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살았다. 그에게는 성공, 가능성, 야심이 그저 스치는 바람일 뿐이다. 수상, 승진, 새집은 더이상 그의 미래가 아니었다. 그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리고 무엇이 될 수 있고 또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읽었다. 암 환자들의 회고록 등 죽음에 관한 글이라면 모조리 읽었다. 죽음을 이해하고 자신을 정의하고 다시 전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벽은 존재했다. 통증이 항상 그를 짓눌렀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똑같은 통증으로 계속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그의 내면에서 즉각적인 응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부조리다. 그는 계속 살고 싶었고, 계속 나아가고 싶었다. 세상은 죽음을 선고했고 그를 곧 멈추게 할 참이었다. 반항했다. 그는 자신이 계속은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숨이 붙어있는 한 계속 나아갔다. 죽음은 찾아지만 실제로 죽기 전까지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다.

내 경험을 언어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밍웨이 역시 비슷한 형태의 저술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풍부한 경험을 하고 충분히 사색한 뒤 글을 쓰는 것 말이다. 내게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들이 필요했다.
폴은 글을 쓰면서 희망을 품을 수 있었고, 그 덕분인지 마치 섬세한 연금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마지막까지 유려하게 글을 써내려갔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병은 종잡을 수 없이 가치관을 바꾸고 있었다.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진리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한다. 나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며칠밖에 살 지 못한다고 가정을 했었는데,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지금까지 느꼈던 것들을 정리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정도 밖에 생각해 내지 못 했다. 그리고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에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깨달을려고 이리저리 고군분투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저자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

그는 신경외과의를 겸한 신경과학자로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죽음이 그 삶을 거부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는 말이 맴돌았다고 한다. 하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예전의 정체성을회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는 존재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닌 것 같다. 파커 J. 파머는 우리가 태어날 때 고유한 씨앗을 내면에 품고 세상으로 나온다고 했다. 만약 그것이 병이나 사고로 인해 달성할 수 없는 무언가라면 나는 어떡하지.

하지만 헤르만 헤세는 우리의 자아는 수 많은 자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파커 J. 파머가 말한 내면의 씨앗과 자아는 다른 것일 수 있겠다.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것과 내 정체성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만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닌 것 같다. 폴 칼라니티는 사람을 구하고 사람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암에 걸리기 전에는 신경외과의라는 정체성으로 그 일을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암에 걸린 후에는 비록 정체성을 바꾸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그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다른 정체성으로 다른 형태의 일을 했지만, 타인을 돕는다는 공통된 가치로 자신의 삶을 채워나갔던 것 같다.

미래를 살다가 현재를 살게 되었다. 인생의 목표를 향해 놓인 사다리를 오르다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오늘을 살게 되었다. 남들이 계획하는 5년은 폴 칼라니티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오늘 말고 내일을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가 되었다. 우리가 죽음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극단적일지 모르지만, 깨달음을 얻어가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행복을 미래로 유보하는 일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미래의 가능성을 담보로 오늘을 나태하게 보내는 일 따위는 버려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될지는 정말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점심 식사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다.
미래는 이제 인생의 목표를 향해 놓인 사다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가 되어버렸다. 돈, 지위, <전도서>의 설교자가 설명한 그 모든 허영이 시시해 보인다. 바람을 좇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폴 칼라니티가 책을 완성해 나가는 도중에 죽음이 찾아왔다. 상태가 너무 악화되어 글을 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죽기 전에 연명 치료를 선택하는 장면에서 폴은 말했다. 〈이번에 어떻게 잘 버틴다 해도, 앞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어〉폴에게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가치는 타인을 돕는 것이었다. 타인을 도울 수 없다면 숨 쉬고 대사 작용을 연장하는 것은 더 이상 가치가 없었다. 그의 아내도 말했다. 〈 폴은 성공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은 시도는 바라지 않아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가망이 없다면, 마스크를 벗고 케이디를 안고 싶어 해요.”〉   (케이디는 폴의 딸이다.)

육체가 살아있는 것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다.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것만으로는 삶을 정의하기에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중환자다. 완치의 가망은 절대 없다. 이것은 진리다. 영원한 법칙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치병에 걸려 연명 치료를 받고 있는 중환자다. 숨 쉬고 대사 작용을 하는 것은 연명일 뿐이다.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것은 연명 치료 수단일 뿐이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연명 수단의 질을 설명하는 것 외에 의미가 없다. 좋은 옷을 입고 비싼 가운을 걸치는 것은 부드러운 환자복을 뽐내는 것 외에 의미가 없다. 비싼 집에 사는 것은 좋은 환자 침대를 뽐내는 것 외에 의미가 없다. 불치병에 걸린 중환자, 즉 시한부의 인생은 어떠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불치병에 걸렸어도 폴은 온전히 살아 있었다. 육체적으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활기차고 솔직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폴 칼라니티의 책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기에 완벽한 책이다. 진실을 고발하는 책이다. 우리는 부조리 속에 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이다. 우리는 절대 그 끝에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끝에 계속 가까워진다. 우리는 완성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완성에 가까워 진다. 이 진리를 담은 책이다. 부조리에 맞선 반항아의 책이다. 진리를 전하기 위한 절박함이 녹아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에 대면하라고 한다. 불확실과 고통이에 저항하라는 책이다. 이길 수는 없다. 패배가 확실하다. 그럼에도 나의 유일한 무기로 찌르라는 것이다. 카뮈는 말했다. 열정으로 반항하라고.

폴 칼라니티의 열정은 무엇이었을까. 딸에게 남기는 지혜였을까. 우리에게 전해줄 메시지였을까. 아내에게 남겨줄 사랑이었을까.     

폴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남들을 도우려 했고, 이는 그만이 남길 수 있는 업적이다. 이 책이 출판된다고 해서 그의 죽음이 준 상실감이 덜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데에서 의미를 발견했고, 이 책에도 그렇게 썼다.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와 오랜 시간 씨름했고 이 책은 그 본질적인 영역을 탐구하고 있다

 

 

✍️ 마무리 생각

크게 두 가지를 배웠다. 헨리 데이비르 소로가 월든을 통해 우리에게 해줬던 말이 더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 생존 필수품은 정말 딱 그 정도의 의미만 갖는다는 것이 그 첫 번째 깨달음이다. 두 번째 깨달음은, 알베르 카뮈의 반항을 더 구체적으로 알 게 된 것이다. 폴 칼라니티가 암에 걸려 죽음을 대면한 이후에 살아온 삶이 부조리에 반항하는 삶 그 자체였다. 어떻게 죽음에 대항해야 하는 지 보았다.

깊은 깨달음을 얻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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