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아리스토텔레스
- 출판
- 현대지성
- 출판일
- 2022.02.14
📚 이 책을 고른 이유
삶의 의미와 행복에 대해서 Claude에게 물어봤더니, 이 책을 추천해줬다. 처음에는 책 제목을 보고 '무슨 윤리학까지 필요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어보니깐, 행복에 관한 책이었다. 사실 책이 어렵다. 자주 등장하는 개념들은 Claude의 도움을 받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큰 틀에서 이 책이 어떻게 구성되었고,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대한 깨달음은 얻었다. 특히 이 책의 해제 부분에서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 인상 깊은 구절들
불멸의 존재가 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며, 우리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61page
그 자체가 신적이든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신적인 것이든 간에 자신의 고유한 미덕에 따라 행하는 활동이 곧 완전한 행복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59page
도덕적 미덕에 관여하는 것은 이성과 지성이기 때문에 이성이 먼저 바른 이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직관적 지성과 철학적 지혜 그리고 학문적 인식이 바른 이성을 만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보편적으로 참인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가지를 통해 인간 이성이 ‘바른’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이성은 인간의 성품과 도덕적 미덕을 바르게 이끌 수 있다. 그렇게 바른 이성을 통해 미덕의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된 후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수단을 선택해야 그 바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알게 해주는 실천적 지혜가 동원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81page
명예나 즐거움이나 지성이나 온갖 미덕은 우리가 그 자체로 선택하기도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 즉 그것을 통해 행복해지리라 여겨 그것들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위해 행복을 선택하거나, 일반적으로 행복 외의 다른 어떤 것을 위해 행복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0page
행복한 삶은 미덕에 따른 삶으로 생각된다. 그런 삶은 놀이를 즐기는 삶이 아니라,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는 삶이다. 또한, 우리는 웃고 노는 것보다 진지하게 일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더 좋은 부분이든 더 좋은 사람이든, 둘 중에서 더 나은 쪽 활동이 더 진지하다고 말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59page
💭 나의 사색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는 인간의 삶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 쾌락적 삶
- 정치적(도덕적) 삶
- 관조적 삶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 삶이 가장 높은 단계의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보았지만, 동시에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거나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제로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덕적 미덕에 따른 정치적 삶이 더 적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그가 강조한 것은 각자의 본성과 상황에 맞는 탁월성(arete; 미덕으로 번역하기도 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관조적 삶(theoretikos bios)은 단순한 지적 활동이 아닌, 우주의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는 삶이다. 이는 신적인 활동에 가장 가깝고 따라서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인정하면서도 "불멸의 존재가 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 완벽한 관조적 삶을 살 수는 없더라도,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멸의 존재가 되려고 최선을 다해야 하며, 우리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61page
그 자체가 신적이든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신적인 것이든 간에 자신의 고유한 미덕에 따라 행하는 활동이 곧 완전한 행복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59page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음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 궁극적으로는 이성에 따른 관조적 활동(theoria)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우주의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가장 높은 형태의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 동시에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통해 도덕적 미덕을 실천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 이런 삶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습관화와 교육이 필요하다. 일회성의 선택이 아닌 평생에 걸친 실천이 요구된다다.
- 쾌락은 덕 있는 행위에 수반되는 것이어야 하며, 쾌락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고유한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동시에 윤리적 덕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eudaimonia)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았다. 이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이러한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아리스토테렐스가 말한 '인간의 고유한 기능'은 나의 고유한 기능이 아니다. 개인의 고유한 기능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공통된 고유한 기능을 말한 것인데, 인간의 고유한 기능을 '이성'이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보편성을 추구하다 보니 개인의 고유한 개성이나 정체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 같다. 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보편적 인간'만큼이나 '개별적 자아'의 실현도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앞서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는 이런 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개인의 다중적 자아와 그것을 수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현대를 사는 사람의 모든 철학적 갈증을 충족시키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다.
분명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믿는다. 그렇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르듯, 인간 또한 모두 동일할 수 없다는 것도 '진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시공간을 초월한 수직적 진리가 있다면 각 시대, 각 공간마다 통용되는 '수평적 진리'도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현대의 관점에서는 보편적 인간에 대한 탐구 뿐만 아니라 개별적 자아에 대한 탐구도 우주적 진리를 찾는 행위가 아닐까? 그럼 현대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풀어보자면,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에 더하여 현재 이곳에서의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며, 그런 존재인 나는 현재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탐구해야 하며, 나아가 이웃들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정도로 압축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보편성(시공간 초월적 진리)과 특수성(현재-이곳의 나), 그리고 이론(탐구)과 실천(이웃과의 관계)을 모두 포괄하는 균형 잡힌 삶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한하고, 필멸의 존재라는 보편적 진리를 토대로, '나는 물질이고 유한하며 반드시 죽는다'라는 특수한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겠다. 여러 고전을 읽으면 그 고전들의 공통된 것이 보일텐데, 그것을 보편적 진리에 대응하게 하고, 고전의 공통된 것을 나의 삶에 적용하는 것을 특수한 진리에 대응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특수한 진리를 찾아내고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관조적 삶일 수도 있겠다. 그런 특수한 진리를 발견하면 내가 이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게 될 것 같다. 그럼 이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른 이성을 통해 미덕의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되는 것을 말할 수 있겠다. 만약 내가 이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게된다면 그 다음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단과 방법을 찾겠지. 그렇다면 이것은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가 동원되는 과정일 것 같다.
도덕적 미덕에 관여하는 것은 이성과 지성이기 때문에 이성이 먼저 바른 이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직관적 지성과 철학적 지혜 그리고 학문적 인식이 바른 이성을 만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보편적으로 참인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가지를 통해 인간 이성이 ‘바른’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이성은 인간의 성품과 도덕적 미덕을 바르게 이끌 수 있다. 그렇게 바른 이성을 통해 미덕의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된 후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수단을 선택해야 그 바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지 알게 해주는 실천적 지혜가 동원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81page
보편적 진리는 인간의 필멸성, 유한성 등 고전들의 공통된 통찰로 볼 수 있고, 특수한 진리는 그러한 통찰을 '나'의 구체적 삶에 적용한 개인적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한 관조하는 삶은 단순히 추상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를 나의 삶에 적용하여 특수한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재해석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전을 통해 얻은 통찰을 통해 '나는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나 안에서 발견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할 것 같다. 그렇게 선택과 실행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 관조적 활동은 책을 읽고 사색하며 내 삶에 적용해보는 활동을 뜻할 수 있겠다. 아니 어쩌면 모두에게 적용되는 활동일 수 있겠다. 결국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답을 발견해 내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과 목적은 모두 어떤 좋음을 향해 있다. 그 좋음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최상의 좋음이 있다. 가장 좋은 좋음은 그것 자체로 선택할 만하고, 다른 어떤 것을 위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것 즉, 행복이다. 우리는 행복이 그 자체로 좋아서 행복을 선택하지, 다른 무언가를 위해 행복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명예나 즐거움이나 지성이나 온갖 미덕은 우리가 그 자체로 선택하기도 하지만, 행복을 위해서, 즉 그것을 통해 행복해지리라 여겨 그것들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위해 행복을 선택하거나, 일반적으로 행복 외의 다른 어떤 것을 위해 행복을 선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0page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좋음이란 무엇일까. 어떤 사물에 있어 좋음이란 그 사물의 고유한 무언가다. 인간에게 좋음이란 인간의 고유한 무엇이다.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테렐스는 그것을 이성이라고 주장한다. 인간(혼)은 학문적 인식과 이성적 추론과 욕망 그리고 자양분을 섭취하는 집합체다. 이중에 학문적 인식과 이성적 추론은 직접적으로 이성과 관련이 있고, 욕망은 간접적으로 이성과 관련이 있고, 자양분 섭취는 이성과 관련이 없다. 인간이 이성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인간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것은 이성이고, 이성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만이 최고의 좋음이다. 이성으로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은 관조적 활동이다. 관조적 활동은 그 자체로 참인 진리들을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진리들을 탐구하는데 몰두할 수 만은 없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좋음을 추구해야 하며, 육체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입고 자는 일에도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좋음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좋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좋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올바른 이성이 필요한데, 올바른 이성은 철학적 지혜로 얻을 수 있다. 즉, 그 자체로 참인 진리를 인식하는 활동과 그 진리를 배우는 활동을 통해 이성을 올바르게 구축할 수 있다.
철학적 지혜로 올바른 이성을 구축했다면,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좋은지 안다. 타인 그리고 나아가 사물을 대할 때 우리는 용기, 정의, 절제, 관용, 온유 등이 좋은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런 좋음은 우리의 감정와 욕망을 제어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제어는 지나침과 모자람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감정과 욕망의 양극단을 피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을 심사숙고 하고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로 우리는 행동한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관조하는 삶을 살면서 타인과 더불어 살 수 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외적인 조건이다. 관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고 자야하며, 타인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나 하나의 존재에 필요한 외적인 조건보다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조건은 많거나 대단한 것은 아니다.
반복하자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것은 행복인데, 그것은 관조하는 삶과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속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바른 상태 또는 성품에서 비롯된 행위만이 '좋은 것'이라고 했다. 결국 관조하는 삶도,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도, 나의 어떤 상태 또는 성품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태나 성품이 그냥 생기지는 않고, 우리가 습관을 통해 그런 상태나 성품을 내재화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한 삶은 미덕에 따른 삶으로 생각된다. 그런 삶은 놀이를 즐기는 삶이 아니라,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는 삶이다.”라고 한 것 같다.
행복한 삶은 미덕에 따른 삶으로 생각된다. 그런 삶은 놀이를 즐기는 삶이 아니라,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는 삶이다. 또한, 우리는 웃고 노는 것보다 진지하게 일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고, 더 좋은 부분이든 더 좋은 사람이든, 둘 중에서 더 나은 쪽 활동이 더 진지하다고 말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 아리스토텔레스 / 박문재 옮김; 259page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조기교육과 법을 통해 우리가 지속적으로 도덕적 미덕(중용)의 활동을 수행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책에서 이어가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일단 나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만족한다. 나중에 기회와 실력이 된다면 읽어봐야겠다.
✍️ 마무리 생각
사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의 절반 이상을 이해하지 못 하고 사색을 한 것 같다.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용했던 단어와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상태로 Claude의 도움을 받아 꾸역꾸역 완주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큰 틀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내용에 더해서 나에게 맞게 변형시켜 소화한 것은 확실하다. 이것이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현재로서는 나에게 가장 알맞게 바꿔서 소화한 것이니 나로서는 최선이다.
읽기 난해한 책이었지만 얻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진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 보편적 진리를 통해 얻은 통찰로 내 안의 진리를 발견하는 깨달음을 얻을 것. 그 깨달음을 실현하는데 심사숙고 하고 반드시 실천할 것. 내 이웃도 나와 같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울 것. 이 정도를 얻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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