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몽테뉴
- 출판
- 메이트북스
- 출판일
- 2019.02.15
📚 이 책을 고른 이유
고명환 작가님이 어느 유튜브 영상에서 몽테뉴의 수상록을 인용했었다. 그래서 머릿속에 몽테뉴의 수상록이 담겨져 있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책을 구매했다. 구매하고 바로 읽은 것은 아니다. 바로 읽기에 제목부터 부담이 되어서 잠시 유보해 두었다가 이제서야 읽어봤다. 그런데 이 책이 참.. 읽기 수월한 부분도 있고 읽기 난해한 부분도 있었다. 비록 발췌본이긴 하지만 몽테뉴가 하고 싶은 말이나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생각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인상 깊은 구절들
신앙의 진리가 우리에게 세속적인 철학을 피하라고 권고하며, 우리가 무슨 사례를 들어본댔자 하나님 앞에서는 미친 수작일 뿐이며, 모든 허영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이 악덕을 대표하며,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잘난 체하는 것은 진실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는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자기가 무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다.
몽테뉴 수상록 - 미셸 드 몽테뉴 / 손우성 옮김; 23 page
💭 나의 사색
수상록의 ‘자만심에 대하여’ 부분에서 몽테뉴가 쓴 아래의 부분의 문장에서 질투와 시기를 느꼈다.
나의 심령은 전적으로 자기를 내세우며 제 식으로 행하는 버릇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각까지 나를 강제하는 지휘자나 주인을 가져본 일이 없으므로 내 마음 내키는대로 살아왔다. 그 때문에 내 성질은 물러져서, 남을 위한 일에는 소용없는 인물이며 나 자신에게밖에 쓸모없어졌다. 그런데 이 둔중하고 게으르고 무위무책한 성질을 억제해볼 필요를 느껴본 일이 없다. 왜냐하면 출생할 때부터 그런대로 만족할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나왔고 가질 만큼 가졌다고 느낄 정도의 지각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더 벌어보려고 한 일이 없었고 더 벌어 보탠 것도 없다.
몽테뉴 수상록 - 미셸 드 몽테뉴 / 손우성 옮김; 22 page
그래서 내게는 하나님이 후하게 내려주신 내 재산을 안온하게 누리며 살아갈 일 밖에 없었다. 나는 괴로운 일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으며, 그런 일을 한다고 해도 하고 싶은 시간에 내 식으로 행한다는 조건으로 행했으며, 나를 신임하는 사람에게서 무슨 부탁을 받으면 내 성미를 알아서 재촉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몽테뉴 수상록 - 미셸 드 몽테뉴 / 손우성 옮김; 23 page
예전에 전재산을 잃고 이 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에 Claude와의 대화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의 단편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그렸다. Claude에게 내가 했던 말은 다음과 같다. 『돈을 초월한 삶을 살고 싶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돈이 벌려서 돈을 초월한 삶을 살고 싶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돈이 벌려서 돈에 구애되지 않는 삶! 돈 때문이 일하는 것이 아닌 삶!』
Claude는 다음과 같이 다시 내게 질문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돈이 있더라도 그것에 마음이 얽매이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혹은 돈이 삶의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되는 상황을 의미하시나요? 이런 구체적인 이해가 있어야, 그 반대편에 있는 '당신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도 더 선명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일을 하기 싫어도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싫다. 돈을 벌기 위해 굳이 이런 일까지 해야하나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싫다. 잠깐 쉬고 싶지만 직장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도 싫다. 나에게 있어서 '돈에 구애받는다'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하고 싶지 않을 때도 일해야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야 하고, 쉬고 싶을 때도 쉴 수 없는 상태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내가 추구하는 삶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닐까.
- 일을 할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 어떤 일을 할지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
-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자유
외부적 압박(특히 경제적 압박)이 아닌, 나의 진정한 선택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원한다. 스피노자는 "자유란 필연성의 인식"이라고 했다. 완전한 자유란 외부적 제약으로부터의 독립만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몽테뉴는 돈을 초월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부러웠고, 그래서 질투와 시기를 느꼈다. 나도 돈을 초월한 삶을 살고 싶다.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몽테뉴는 그렇게 살았다.
나는 괴로운 일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으며, 그런 일을 한다고 해도 하고 싶은 시간에 내 식으로 행한다는 조건으로 행했으며, 나를 신임하는 사람에게서 무슨 부탁을 받으면 내 성미를 알아서 재촉하는 일이 없으리라는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몽테뉴 수상록 - 미셸 드 몽테뉴 / 손우성 옮김; 23 page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출생할 때부터 그런대로 만족할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나왔고 가질 만큼 가졌다고 느낄 정도의 지각을 가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더 벌어보려고 한 일이 없었고 더 벌어 보탠 것도 없다.
몽테뉴 수상록 - 미셸 드 몽테뉴 / 손우성 옮김; 22 page
몽테뉴는 만족할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태어났고, 더 벌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몽테뉴는 굳이 돈 때문에 일할 필요가 없었다. 일을 할지 말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고, 어떤 일을 할지 말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고, 언제 일을 할지 말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다. 왜? 돈에 구애받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래서 몽테뉴가 부러웠다.
그럼 나도 만족할 정도의 재산을 모으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또 다시 재산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나는 반드시 실패하고 좌절하고 망한다. 재물은 지혜의 면류관이라고 했다. 재물을 바라보면 반드시 그 재물이 날개를 달고 사라지지만, 지혜를 바라보면 그에 상응하는 재물은 반드시 곁에 머문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자유로운 삶은 지혜를 기반으로 생성되고 유지될 것이다. 지혜를 탐구하고 훔치고 베끼는 작업을 꾸준히 해야겠다. 나는 정말로 그것이 나에게 자유로운 삶을 선물할 것이라고 믿는다.
수상록의 레이몽 스봉의 변해(변호) 부분은 정말 난해했다. 다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절대적인 진리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참 난해했다.
레이몽 스봉 '자연신학'은 이성적 논증만으로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증명하려 했던 책이라고 한다. 레이몽 스봉은 신의 존재와 기독교 교리를 순수한 이성적 논증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몽테뉴가 이 책을 변호(변해)하면서 오히려 이성으로 신앙을 증명하려는 시도 자체를 비판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레이몽 스봉의 변해'로 알려진 내용의 핵심적 아이러니라고 한다.
신앙의 진리가 우리에게 세속적인 철학을 피하라고 권고하며, 우리가 무슨 사례를 들어본댔자 하나님 앞에서는 미친 수작일 뿐이며, 모든 허영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이 악덕을 대표하며,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잘난 체하는 것은 진실로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는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자기가 무엇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다.
몽테뉴 수상록 - 미셸 드 몽테뉴 / 손우성 옮김; 23 page
이어서 인간의 이성의 불완전함과 허약함을, 인간은 짐승과 대등하다는 사실을, 따라서 인간이 사실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오만함과 자만에 사로잡혀 자신의 불완전한 이성으로 절대 불변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혹은 깨달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고뇌에 빠지게 하여 무지한 것만 못 한 상태에 이른 존재임을, 사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결정하고 선택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직관적 이성을 통한 제1원칙을 인식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것 같다. 인간의 이성이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제1원칙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추구하기 보다는 그 한계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게 더 지혜로울 수 있다고 하는 것 같다.
직전에 읽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느낀 바는 다음과 같았다. 인간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한하고, 필멸의 존재라는 보편적 진리를 토대로, '나는 물질이고 유한하며 반드시 죽는다'라는 특수한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있듯이, 여러 고전을 읽으면 그 고전들의 공통된 것이 보일텐데, 그것을 보편적 진리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고, 고전의 공통된 것을 나의 삶에 적용하는 것을 특수한 진리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특수한 진리를 찾아내고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관조적 삶일 수도 있겠다. 그런 특수한 진리를 발견하면 내가 이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게 될 것 같다. 그럼 이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른 이성을 통해 미덕의 방향 설정이 바르게 되는 것을 말할 수 있겠다. 만약 내가 이생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게된다면 그 다음으로는 그것을 이룰 수단과 방법을 찾겠지. 그렇다면 이것은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가 동원되는 과정일 것 같다.
하지만 몽테뉴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보편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불완전한 이성으로 파악한 것이어서 절대적 확실성을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원불변한 진리의 직접적 관조를 말했는데, 몽테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의 관조로 생각을 바꿀 수도 있겠다. 확실한 진리를 찾는 것보다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천적 판단을 해나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덜 확신적이되 더 유연한 진리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방향인걸까? 사실 모든 고전이 내포하는 불변의 진리는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시대도 장소도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썼을텐데.. 그럼 고전을 통해서 어떤 진리 내지 지혜를 발견해야 하는걸까... 어떤 것을 나에게 투영해야 내 안에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 마무리 생각
몽테뉴의 삶이 참 부럽다. 돈을 초월한 삶... 나는 시기와 질투를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야겠다. 내가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 나는 돈과 무관할 수 없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넘어서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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