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남을 위해 살게 된다
“인생은 고통이다.” 부처와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이 말처럼 인생에는 수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누구나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바로 우리가 세상일을 맘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데서 온다.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도 세상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으며 그저 무심하게 흘러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노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은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이에 대해 해답
저자
에픽테토스
출판
페이지2북스
출판일
2024.07.17

📚 이 책을 고른 이유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순할 수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월든을 읽고 난 후에 Claude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 대화의 끝에서 Claude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었는데, 그 책들 중에서 엥케이리디온이라는 이름이 너무 독특해서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에픽테토스라는 사람의 이력도 굉장히 주목할 만 했다. 노예의 신분으로 위대한 철학자가 되다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 인상 깊은 구절들

재물을 빼앗겼는가? 그 또한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앗아간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 그 사람이 가진 재물 또한 누군가에게 돌아갈 것이니 당신이 관여할 필요는 없다. 무엇을 가지고 있더라도 당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여행자가 숙소를 집이라 여기지 않는 것처럼.
그러므로 사소한 일에서부터 관점을 바꾸어 보라. 아끼는 기름을 쏟았는가? 귀한 술을 도둑맞았는가? 이렇게 되뇌어라. “이건 마음의 평온과 평정을 위해 지불한 대가다. 세상에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작가가 당신을 가난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으로 설정했든, 혹은 귀족이나 왕으로 설정했든 그 역할을 잘 해내면 된다. 배역을 잘 소화하는 일이 당신의 몫이며 배역을 선택하는 일은 당신의 몫이 아니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각자의 의지에 달린 것이므로 그것을 위해 타인과 경쟁하거나 비교하며 남을 시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군이나 정치인이나 권력자가 되기보다는 자유를 갈망해야 한다. 그리고 자유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관심을 거두는 것이다.
우리가 모욕을 느끼는 것은 누군가의 욕설이나 폭력이 아니라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 때문이다.
인생에는 죽음이나 추방과 같은 여러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날마다 죽음을 떠올리면 결코 탐욕과 절망으로 고통받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없다. 그 아픔을 허락할 때만 당신은 아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이웃과 집단과 공동체에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와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정해 둔다면 모든 상황에서 처신할 바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통제할 수 있는 일에서만 선과 악을 구분한다면 그 무엇으로부터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만일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을 좋거나 나쁜 것으로 규정한다면,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경우 신을 탓하고 책망하게 된다.
고기와 음료, 집, 의복, 그리고 가까이 지내는 하인 등은 필요한 만큼만 두라. 과시와 사치를 목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끊어 버려라.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겠다고 판단했다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저 없이 실행하라. 물론 올바른 일이 아니라면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올바르다면 왜 당신을 부당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가?
자신의 능력 범위를 넘어선 역할을 맡지 마라. 그것은 자신을 혹사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잘해낼 수 있는 역할도 맡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걸을 때 못을 밟거나 발목을 접질리지 않도록 조심하듯,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마음의 중심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점을 마음에 새긴다면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안전하게 살아 갈 수 있다.
무엇을 갖든 기준에 맞게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면 반드시 벼랑 끝에서 추락하게 된다. (중략) 이처럼 욕망이란 한번 적당한 기준을 벗어나면 이내 무한히 뻗어나가 버린다.
당신이 스스로 정립한 원칙이 있다면 그것을 법처럼 지켜라. 지키지 못할 경우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 누군가 당신에 대해 이야기해도 관심을 두지 마라. 당신에게 속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DALL-E, 내 알 바가 아니야.


💭 나의 사색

재물을 빼앗겼는가? 그 또한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내가 모았던 전재산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 한 문장이다. 나는 전재산을 날렸다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내가 나의 전재산을 날렸다. 그런데 전재산을 날린 것이 아니라 전재산이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이라고? 공수래공수거가 생각난다. 사실 나는 빈 손으로 시작했고 돈이 모였고 다시 내 손을 떠났다. 돈이 나에게 와서 잠깐 놀았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만약 그렇다면, 또 언제가 다시 나에게 와서 놀겠지.

그러므로 사소한 일에서부터 관점을 바꾸어 보라. 아끼는 기름을 쏟았는가? 귀한 술을 도둑맞았는가? 이렇게 되뇌어라. “이건 마음의 평온과 평정을 위해 지불한 대가다. 세상에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위 문장을 읽고 어안이 벙벙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 투자로 돈을 잃고 ‘에잇! 인생 공부 비싸게 했다!’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닌 것 같다. 그 정도를 초월하는 지혜를 전해준 것 같다. 그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세상에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끼는 기름과 귀한 술을 잃고 마음의 평온과 평정을 얻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재산을 지불하고서 나는 무엇을 대가로 받았을까. 인생을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인생 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모아온 내 인생 전부를 대가로 지불했다. 그리고 나는 그 대가로 어떤 지도를 얻어냈다. 내 인생의 가치와 동등한 값어치를 지닌 지도. 그것은 보물지도다. 보물은 뭘까. 새 인생이다. 그러나 보물의 위치는 그려져 있지 않다. 마치 어떤 퀘스트를 받은 느낌이다. 전재산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히든 퀘스트. 그 보상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고유한 스킬. 그런데 그 스킬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 인생을 대가로 지불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을 지불했으니 그에 맞는 대가는 인생일 수 밖에 없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에픽테토스는 엥케이리디온을 통해 나에게 통제와 태도 그리고 자유와 지혜를 말해주었다.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해야 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선과 악을 구분해서 거기에 집중하라는 것 같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 같다. (알프레드 아들러가 말한 과제의 분리랑 비슷한 것 같다.)

월든을 통해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소박한 삶을 유지하면서 진정한 나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찾는 모험을 떠나라고 했다. 그리고 그 모험은 내 내면에서 이루어진다. 에픽테토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고기와 음료, 집, 의복, 그리고 가까이 지내는 하인 등은 필요한 만큼만 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 철학자의 삶을 살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내면에 존재하는 진실, 진정한 나,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찾지 못해서 나는 괴롭다. 여전히 괴롭다.

고기와 음료, 집, 의복, 그리고 가까이 지내는 하인 등은 필요한 만큼만 두라. 과시와 사치를 목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끊어 버려라.

우리는 철학자와 세속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당신도 당신의 지혜를 무지한 사람들 앞에서 설파하기보다는 그 지혜가 소화되어 나타나는 행동으로 보여주라.

그 의미를 내 삶에 적용하는 일이다. 이 단계야말로 자랑할 만한, 가장 가치 있는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박한 삶과 마음의 불순물들을 없애면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원하는 삶을 발견할 수 있을까. 답답할 때 AI와 대화를 하면 도움이 된다. Claude는 앞의 두 철학자가 제시한 ‘단순함으로의 회귀’는 방법론적 측면일 뿐, 그 자체로 답은 아닐 것 같다고 한다. 비록 물질적 단순함과 마음을 흐리는 불순물을 걷어내는 과정을 거치더라도 ‘진정한 나’를 '못' 찾을 수도 있고 그래서 더 괴로울 수도 있다고 한다. 뼈 아픈 말이다.

Claude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나’는 어떤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우리가 계속 만들어가는 것일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조각가가 돌을 깎아가며 작품을 만들어내듯이, 우리도 살아가면서 계속 우리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란다. 지금 내가 느끼는 괴로움은 어쩌면 이 여정의 자연스러운 일부일 수 있다고 한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삶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종 괴로움을 느끼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진짜 '나'이고, '어느 순간'부터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답을 찾지 못 한 지금부터 진정한 삶이 시작된 거라고 말하고 싶은건가. '진정한 나'를 찾은 후에 '진짜 삶'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고민과 방황, 그리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나의 진정한 삶인건가.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느끼는 불확실함과 고통도 나의 삶의 진실한 한 부분이고,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건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내 안의 신대륙을 발견하는 콜롬버스가 되라고 했다. 그래, 신대륙을 찾아 떠나는 그 과정을 생략할 순 없을 것이다. 그 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고전을 쓴 옛 철인들이 조금씩 수정해 줄 것이고, 그 배의 속력은 시간이 정해줄 것이다. 내가 조급해 한다고 신대륙에 일찍 도착할 순 없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방향인 것 같다. 속력은 내가 통제할 수 없지만, 방향은 내가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불확실함과 고민도 항해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겠지. 폭풍우 치는 날도 있고, 안개 낀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듯이.

고명환 작가는 자기 안에 존재하는 세 명의 거인을 깨웠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로가 말한 신대륙은 여러 개의 대륙으로 이루어진 세계일 수 있다. 어떤 대륙에는 시인이, 다른 대륙에는 철학자가, 또는 모험가가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 이 모든 모습들이 다 진정한 ‘나’일 수 있겠다. 나의 항해는 내 안의 모든 가능성을 깨우러 다니는 여정일 수 있겠다.

하지만 오늘은 안개 낀 바다 위를 지나고 있다. 우울하고 괴롭다. 앞이 보이지도 않고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독서와 사색을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이 배의 유일한 키이며 내가 가진 유일한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이 항해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이 항해를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소로와 에픽테토스가 말한 '사치 없는 생활필수품'이지 않을까. 그리고 독서와 사유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 나락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다.

 

✍️ 마무리 생각

[이 책이 나에게 준 의미와 앞으로의 계획을 작성합니다] 

소박한 삶을 유지하면서 나 자신을 탐구하고 발견하는 작업을 멈추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특히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는 말이 가장 인상 깊었다. 옛날에도 이런 말을 조언으로 들었거나, 지나가다 들었던 적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 말이 지금 새롭게 다가온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에 집착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돈을 벌 생각보다 돈을 부풀릴 생각에 도취되어 있었다. 버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데, 부풀리는 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내가 느끼는 기분의 통제 권한을 내가 아닌 다른 것에 위임하고 있었다. 내가 기뻐하기 위해서 투기자산의 가격이 오르길 빌었다. 투기자산의 가격이 내리면 어김없이 나는 우울했다. 통제권이 나에게 없었다. 아니, 내가 나 아닌 다른 것에 통제권을 위임했다.

통제권을 다시 가져와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신경을 끄자. 내 알 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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