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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INSPIRATION (마음의 꾸준함)/오늘의 독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 - 레프 톨스토이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게 맞나"

by S.P 2025. 2. 5.
 
이반 일리치의 죽음
삶과 죽음의 참된 의미를 사납게 파고드는 웅숭깊은 통찰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사상과 철학이 집약된 경이로운 걸작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의 원작,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에 영감을 준 작품!
저자
L.N. 톨스토이
출판
민음사
출판일
2023.12.08

📚 이 책을 고른 이유

사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다가 생각보다 읽기 어려워서 다른 책을 먼저 읽기로 했다. 그리고 발견한 책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인데, 이 책이 나를 사로잡은 까닭은 책 제목에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전재산을 잃었을 때 경제적으로 사망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단어에 끌렸던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 톨스토이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이런 궁금증과 질문을 가지고 책을 펼쳤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횃불 삼아 톨스토이의 세계로 들어갔다. 

DALL-E, 죽음 앞에서 깨달은 삶


💭 나의 사색

톨스토이가 이렇게 말해준 것 같다.

“그래요, 당신은 본인이 바라던 소망이 신기루였다는 걸 깨달았고, 목숨보다 소중하게 모으던 돈이 날개를 달고 날아간 이유를 찾았군요. 이반 일리치는 죽음 앞에서, 당신은 파산 앞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마땅히 살아야 했던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이반 일리치는 꺠달음을 얻었지만 다시 살아볼 기회를 얻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반 일리치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갖고 찾아오셨다고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거짓이었지만, 이제는 진짜를 살겠다고요. 무엇을 쫓아야 하냐구요? 그것이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쫓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냐구요? 이반 일리치처럼 답은 이미 당신이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세요.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끝에서 빛을 보았습니다. 자신 안에 있던 충동을 보았습니다."

죽음.. 죽음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봤다. 내가 오늘 죽으면 어떨까. 내가 내일 죽는다면 뭘할까. 사색의 시간이다.

내가 오늘 죽는다면,

장소가 중요할 것 같다. 노을이 보이는 높은 언덕 위 소나무 아래 기대어 앉아. 시간도 중요할 것 같다. 포근한 날씨였으면 좋겠다. 긴팔과 긴바지를 입으면 온 몸을 포근한 어떤 존재가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날씨. 늦봄의 언덕이라도 좋을 것 같고, 초여름의 언덕이라도 좋을 것 같다. 초가을의 오늘도 포근하다면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고를 수 있다면 6월 즈음이었으면 좋겠다. 그때면 포근함도 포근함이지만 초록의 생명력이 왕성하기 시작할 때일테니, 넘쳐나는 생명력을 뽐내는 그것들을 바라보면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걸 잊은 채 저들처럼 성장에 주목할 것 같다. 퇴근하는 사람들도 보이면 좋겠다. 할 일을 마친 이들이 안식처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이제 저 노을 빛이 사라지고 저 생명력 짙은 나무들의 초록빛마저 볼 수 없게 되면 저들이 집으로 돌아가듯, 나도 안식에 들어간다는 위안을 삼고 잠 잘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여자친구와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한테 부탁하고 싶다. 노을이 지는게 보이는 높은 언덕 위 소나무 아래 포근히 앉은 채 짙어져 가는 초록색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퇴근하는 사람들도 바라보다가 노을이 거의 다 지고 나뭇잎도 흑빛으로 변하고 사람들도 대부분 다 집에 도착하면 졸음에 못이겨 눈이 감길건데, 혹시 그때까지 옆에 같이 있어줄 수 있겠느냐고. 혹여 외로울 것 같아서.

생각해보니 해가 제일 길 때 죽는게 좋겠다.

내가 일주일 뒤에 죽는다면,

부모님이랑 동생들이랑 소갈비살 집에 가서 밥을 먹을 것 같다. '뭐.. 안타깝지만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말을 시작할 것 같다. 잠은 집에서 자긴 싫다. 가족들이랑 자되 집은 싫다. 혼자 집이 아니 곳에서 자도 괜찮겠다. 어쨌든 집에서 자긴 싫다.

그 다음으로 전도사님이랑 밥을 먹을 것 같다. '뭐.. 이렇게 됐습니다. 뭐 안타깝긴 한데 뭐 어쩌겠습니까.'로 말을 시작할 것 같다. 전도사님이랑은 곱장이랑 막창을 먹을 것 같다. 콜라도 마실 것 같다.

그 다음은 여자친구를 만날 것 같다. 여자친구가 많이 울 것 같다. 나도 울 것 같다. 뭘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먹어봤던 것 중 하나를 고르지 않을까. 아, 유부초밥을 먹을 것 같다. 국물 닭발이랑.

그 다음엔 내가 지내왔던 곳을 가볼 것 같다. 예전에 살았던 집, 내가 다녔던 학교, 내가 지나다니던 골목, 할머니랑 걸었던 길.. 내가 잠깐 있던 곳이 아니라 내가 머물렀던 곳을 다시 가볼 것 같다. 그렇게 다 가보고서 시간이 남으면 친구들에게 안부 인사 정도 남길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교회 예배당에서 마지막 잠을 자고 싶다. 환하게 불이 켜진 예배당 안에서 푹신한 장의자에 앉아 벽에 기대어 찬송가나 설교를 들으면서 졸다가 자고싶다.

내가 한달 뒤에 죽는다면, 한 삼주일 정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남은 일주일은 저번처럼 지내고 싶다. 여행도 저 멀리 유럽이나 미국 말고. 아니다. 먼저 내가 살아왔던 곳부터 꼼꼼히 볼 것 같다. 그러고 시간이 남으면. 아니다. 먼저 앞의 일주일처럼 일주일을 먼저 지낼 것 같다. 대신에 내가 머물렀던 곳에서의 기억과 감정들을 꼼꼼히 추억하고 기록할 것 같다. 마지막 잠은 엄마아빠 옆에서 잤으면 좋겠다. 엄마랑 아빠 사이에 누워서 내가 꼼꼼히 적어놓은 내 기억과 감정들을 내 남은 시간동안 내 눈이든 내 머리든 내 가슴이든 내 어디에든지 좋으니 어떻게든 꾹꾹 눌러담다가 잠들고 싶다.

내가 일 년 후에 죽는다면,

앞선 한달을 보냈던 것처럼 보내고서는 죽어라 일할 것 같다. 최대한 많이 모아서 엄마랑 아빠한테 주고 싶다.

내가 이 년 후에 죽는다면,

조금 기쁠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시 한번씩 또 볼 수 있다는게 조금 위안이 된다. 아 물론 이미 앞에서 5번이나 죽어봐서 그런 것이다. 앞선 5번에는 다 모든게 다 한번씩이었는데 이제는 최소한 계절은 또 볼 수 있지 않은가. 또 볼 수 있다는 게 나에게 아주 작지만 옹골진 기쁨을 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첫 계절마다 같은 사람들과 만나고 같은 장소들에 가볼 것 같다. 내가 살아온 장소를 계절마다 방문하고 거기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떠오르는 기억들을 세세하게 적어놓을 것 같다.

그리고는 계절마다 그 계절에 다녀왔던 곳을 가볼 것 같다. 그 계절의 공기가 떠오르게 하는 곳을 갈 것 같다. 봄에 라일락 향기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퍼져있어서 공기가 향기로 바뀐게 아닌가 착각을 주었던 봄날의 대학교 후문 카페 앞.

아주 어릴 때 가족여행 갔던 여름 바닷가도 가고 싶다. 다시 그 때로 그리고 그 때의 그 장소로 갈 순 없지만. 식당에 나랑 투닥거리던 사마귀도 그립다. 형광빛의 초록색 작은 몸뚱아리로 잘도 날아다녔는데.

가을에는 어린이대공원에 들르고 싶다. 학생 시절 사생대회로 어린이대공원에 갔었다. 주제가 여러 가지였는데 나는 그중에서 가을을 골랐다. 한.. 두어시간 가을을 그리려고 골똘히 생각하고 주변을 바라보다가 발밑에 단풍잎 하나가 보였다. 그 단풍잎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던게 아니라 잡초와 이름 모를 나뭇잎과 단풍잎이 사방천지에 널려있었다. 그중에 그리기 쉬워 보이는 단풍잎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서는 사생대회가 끝날 때까지 내 몫으로 주어진 커다랗고 하얀 도화지 정중앙에 단풍잎을 하나만 그려놓았다. 가을이 되면 가을을 보러 어린이대공원에 가봐야겠다.

겨울이 되면 풍경들을 담아봐야겠다. 지금까지 겨울을 차별하며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앙상한 나무마저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되도록 2년 뒤에 죽는다면 그 시작은 여름이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이 겨울이면 노을이 보이는 높은 언덕 뒤 소나무 아래 기대어 무언가를 바라보는 게 너무 추워서 힘들 것 같다.

그렇게 모든 계절을 한번씩 나면 이번에는 나의 1년을 남에게 알리고 싶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모습과 기억과 감정을 남김 없이 전달하고 싶다. 특히 내가 느낀 것만큼이나 자세하게 가족들이 계절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러고서 가족들 품에서 마지막 잠을 자고 싶다.

그렇게 2년을 살다가 다시 2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3년 뒤에 죽는다고 생각하니깐 시간의 길이를 쉽게 느낄 수 없어서 가정을 바꿔봤다) 너무 기쁠 것 같다. 너무 행복할 것 같다. 이제는 내일 뭐 할지 기대할 것 같다. 그 기대에서 설렘도 느껴진다. 이제는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에게 신경써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것 같다. 나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고 할 것 같다. 대신 그 동안 고마웠다고 할 것 같다. 이제 이 선물과도 같은 2년 동안 뭘 할까. 뭘 할까. 뭘할까 하다가 뭘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자연이나 감정 그리고 기억처럼, 그냥 느끼는 것보다 무언가를 알아내면서 느껴지는 뭔가를 시작해도 될 것 같다. 뭔가 쌓이면 뭔가 다른 게 보이거나 새로운 게 느껴지지 않을까. 보다 깊은 무언가. 보이지 않았던 무언가를 알아내고 싶다. 본질이라고 해야하나.

그런데 죽음이 점점 멀어지니깐 나태해지고 싶다. 본질이고 뭐고 그냥 더 자고 싶다. 나중에 하고 싶다

뭔가 2년 안에 그리고 2년 동안 세상을 충만하게 느끼게 하는 건 없을까. 아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 봐야겠다. 이야기를 찾아다닐 것 같다. '당신의 삶을 들려주세요'라고 하면서 이사람 저사람을 찾아다닐 것 같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저 멀리에 있는 사람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궁금하다. 그들의 이야기로 세상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걸론 부족해. 나를 알아내고 싶어. 날 충만하게 느끼고 싶어. 난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반응하는 사람인지. 알아내고 싶어. 배워서라도 알아내고 싶어.

봄여름가을겨울, 집, 엄마, 아빠, 학교, 놀이터, 산, 나무, 하늘, 바다...다양한 세상의 모습에서 내가 추억하는 기억과 감정을 온전하게 느끼고 싶다. 다른 사람도 그러한지. 다른 사람은 어떤지. 그들은 왜 사는지. 어떤 기억을 떠올리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반응을 하는지 궁금하다. 관찰할까. 인터뷰를 요청할까. 책을 읽을까. 무엇이든 좋다. 사람들을 알아가 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어떤 생각을 할까.

나랑 같구나. 나랑 다르구나. 나랑 비슷하구나. 나라면 이럴텐데. 나라면 저럴텐데. 나라면 안 할텐데. 나라면 할텐데. 나라면 못 할 텐데. 나는 못하는데. 나는 안 하는데. 나도 하는데. 나라도 하겠는데. 내가 더 잘할 것 같은데. 내가 해도 저렇게는 못 할텐데. 나도 좋은데. 나는 싫은데. 왜 저게 좋지. 왜 이게 싫지. 왜 이걸 모르지. 와 저건 뭐지.

그런데 진짜 내가 이걸 원한다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해보지 않은건데? 귀찮지 않나? 인터뷰를 거절하면? 근데 거절이 뭐 대수인가? 나중에 다시 기회를 노리면 되지 않나. 근데 진짜 내가 이런걸 원한다고?

어쨌든 죽기 전에 나를 알고 싶고 남도 알고 싶을 것 같다.

나의 감정을 나누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머물렀던 곳에 다시 머물다가 내가 지나갔던 곳을 다시 방문했다가 계절을 느끼고. 계절 속에 넣어놨다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기억과 감정. 그러니깐 추억을 남김 없이 꺼냈다가 정리하고 기록해서 '나의 삶은 이랬었다', '나는 이런 걸 느꼈다', '내가 본 계절은 이렇다' 전했다가.

다른 사람의 삶은 어땠는지, 어쩌고 있는지, 어쩔 건지. 들여다 보고. 어떤 걸 느꼈는지, 어떤 걸 느끼고 있는지, 그들이 본 계절은 내가 본 계절과 똑같은지, 뭐가 다른지, 왜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고 느끼다가...

✍️ 마무리 생각

사색에 잠겼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버스를 타고 있었다. 버스 창가로 바라본 풍경이 궁금해졌다. 저 교회는 누가 왜 저렇게 지었을까. 저 언덕에는 누가 다녀갔을까. 그 사람은 언덕에서 무얼 했을까. 나라면 그 언덕에서 뭘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 언덕에서 누굴 만났을까. 그 둘은 뭘 했을까. 그 둘은 다음에도 만났을까. 저 검은 비닐하우스를 어떻게 글로 써야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저 십자가 모양의 네모 반듯한 하얀 창틀에 비친 햇빛을 나말고 또 누가 봤을까.

문득. 이런 질문들이 이어지고 모이다가 질서정연하게 정리되면 소설이나 수필이 만들어 지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나도 하나의 소설이고 수필이라면? 읽어보고 싶다.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우울했는지. 울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지금은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우울할지. 행복할지. 슬플지. 기쁠지. 혼자일지. 여럿일지.

결말은 궁금한가. ….아니. 결말을 볼 순 없어. 결말은 없어. 그냥 글이 쓰이다가 끊긴 곳에 도달하는거야. 끊긴 곳은 끊기기까지 알 수 없어. 이 소설은 끊긴 곳까지 쓰이고 있어. 그래서 결말은 궁금하지 않아. 사실 항상 결말이야. 결말이 쓰이고 있는 거지. 그래서 결말은 궁금하지 않아. 나는 계속 결말을 읽고 있는 중이야. 남이 말하는 결말은 없어. 결말은 끊긴 곳이야. 끊긴 곳은 끊기기 전까지는 몰라. 그래서 이 소설은 결말이 쓰이고 쓰이고 쓰이는 중이야.